
기후위기에 대한 뉴스를 챙겨보는 내가 처음엔 자랑스러웠다. 의식 있는 시민이 된 것 같았고,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안도감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뉴스를 본 후의 나는 무력했고, 불안했고, 때로는 무의미했다. ‘지구를 걱정한다’는 고상한 감정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체념과 피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글은 기후위기 관련 정보를 따라가다, 감정이 무너진 내 이야기다.
1. 기후위기 뉴스가 나를 마비시킨 방식
① 정보는 많지만, 나는 점점 작아졌다
매일 아침, 뉴스 앱에는 ‘사상 최악의 폭염’, ‘해수면 상승 가속’, ‘이상기후로 인한 식량위기’ 같은 제목이 떠 있다. 관련 영상은 실감나게 편집되어 있고, 사진은 극단적 현실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이런 뉴스가 반복될수록 나는 ‘작아진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고, 이런 상황에서 뭘 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계속 보고만 있었다. 마치 재난 영화를 무한 반복 재생하는 관객처럼. 정보는 쌓이지만, 행동은 멈췄고, 감정은 마비되었다.
② 감정은 있지만 방향이 없다
기후위기 뉴스를 볼 때마다 나는 분노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왜 아무도 바꾸지 않는 걸까. 그런데 그 분노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고, 곧 무력감으로 바뀌었다.
플라스틱 빨대를 쓰지 않는다고, 텀블러를 들고 다닌다고, 정말 이 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뉴스는 문제를 보도하지만, 해답은 주지 않는다. 그건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감정은 있지만 방향이 없는 상태’, 그게 내가 무너진 첫 번째 이유였다.
2. 뉴스가 아닌 감정 정리를 먼저 해야 했다
① ‘정보를 소비하는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뉴스를 본 후 내 상태를 기록해보았다. ‘오늘은 해빙 속도가 빨라졌다는 기사를 읽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기후 난민 이야기를 본 후 내가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알게 됐다. 나는 뉴스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게 아니라, 뉴스로 인해 나를 잃고 있었다는 걸. 정보는 머리에 남지만, 감정은 마음에 쌓여 있었다. 그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면, 나는 계속 불안한 상태로 남아야 했다.
② 정보보다 ‘감정 필터’가 먼저 필요했다
그래서 나만의 필터를 만들었다. 모든 기사를 실시간으로 보지 않기. 감정이 불안한 날엔 기후 관련 뉴스 피하기. 기사를 본 후엔 반드시 나의 감정 기록하기.
이런 루틴은 감정을 덜 흔들리게 해주었고, 정보를 받아들이되 마비되지 않게 해주었다. 기후위기를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에 휘둘리지 않는 나’를 만들기 위한 훈련이었다.
3. 작은 실천으로 되찾은 감정의 방향
① 의미 있는 행동을 찾기 시작했다
감정이 무기력할 때 필요한 건 거대한 실천이 아니었다. 그저 작은 행동 하나라도 ‘내가 할 수 있다’는 감각이 중요했다.
나는 전기 사용량을 체크하기 시작했고, SNS에서 무분별한 ‘기후 혐오 게시물’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기후와 관련된 감정을 글로 정리해 블로그에 올렸다.
작은 실천이지만, 그것은 감정의 방향을 되찾는 시작이었다. 정보가 아닌, 나의 삶에서 출발한 행동. 그건 더 이상 뉴스에 휘둘리지 않는 감정 훈련이었다.
② 연결은 불안을 줄여주었다
뉴스를 함께 이야기할 친구를 찾았다. ‘나도 요즘 기후뉴스가 너무 무섭다’고 말하는 친구와의 대화는 생각보다 나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감정은 숨기면 무거워지고, 공감받으면 가벼워진다.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문제 속에서도, 서로를 지지하는 감정의 연결은 내가 다시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다.
결론: 기후위기보다 앞서 관리해야 할 것은 나의 감정
뉴스는 멈추지 않고, 기후위기는 당분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감정의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다.
정보보다 감정이 먼저고, 불안보다 연결이 먼저다. 오늘 당신이 기후위기 뉴스에 무력감을 느낀다면, 그 감정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감정이 쌓이기 전에 작은 실천과 연결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나도 여전히 뉴스를 본다. 하지만 이제는 감정을 기록하고, 작은 실천을 하고, 서로를 연결하며 다시 살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