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에 한 번 꼴로 휴대폰에 익숙한 알람이 울린다. “[기상청] 오늘 14시부터 시간당 50mm 이상 강한 비가 예상됩니다. 외출 자제 바랍니다.” 또 며칠 후 "오늘은 강풍주의보가 발효중입니다. 간판 등 부착물 고정, 나갛물 주의, 야외활동 자제 등 안전에 유의 바랍니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또 하나의 ‘재난 문자’일 뿐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재난 문자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자에 반응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1. 재난 문자가 일상이 된 풍경
① 처음엔 두려웠다, 지금은 무감각하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재난 문자 하나에 긴장했다. 홍수, 태풍, 폭염, 산불… 어느 날은 학교가 조기 하교하고, 어느 날은 출근길이 통제됐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자주 울린다. 주 3~4회씩 도착하는 알림 속 재난들은 더 이상 ‘위기’가 아니라 ‘날씨 알림’처럼 느껴진다. 감정의 예비 반응이 사라졌고, 나는 그 문자들을 넘기기만 하는 사람이 되었다.
②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감정은 끝나버렸다
기후위기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이상기후, 국지성 폭우, 강한 태풍, 대형 산불. 뉴스에서는 역대급이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익숙해져 있다.
위험은 계속되는데, 감정은 반응을 멈췄다. 이게 과연 적응일까? 아니면 감정의 마비일까?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2. 기후적응은 감정을 버리는 일일까?
① '살기 위해서 감정을 덜어낸다'는 아이러니
‘기후적응’이란 말은 생존의 전략이다. 기후가 바뀌면, 인간도 바뀌어야 한다. 열섬현상이 심해지면 실내 중심의 일상으로 전환하고, 폭우가 잦아지면 도시 설계도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적응’이라는 말이 감정에서도 통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두려움, 긴장, 분노 같은 감정 반응을 점점 더 줄이고 무뎌지는 것이 과연 ‘적응’일까?
나는 감정을 잃는 방식으로 기후에 적응하는 것이 아닐까 두려워졌다.
② '이 정도면 괜찮은 거지'라는 합리화의 위험
재난 문자, 위험 경보, 초미세먼지 수치. 그 수치가 점점 나빠지는데, 사람들은 ‘이 정도면 견딜만하지’라고 말한다.
그 말은 일견 강인함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감정의 포기일 수도 있다. 문제의 심각함을 감지하지 않으면, 변화도 행동도 나오지 않는다.
기후적응이 ‘참아내는 법’이 되면, 우리는 결국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셈이다.
3. 감정을 지키는 방식으로 기후에 적응할 수 있을까
① 나는 무감각을 경계하기로 했다
재난 문자가 도착했을 때, 나는 일부러 그 내용을 소리 내어 읽는다. 비웃지 않고, 넘기지 않고, 잠시라도 그 정보가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상상해본다.
그리고 내 감정을 기록한다. “오늘도 비가 많이 온다고 한다. 나는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 조금 무섭다.” 이 작은 기록은 나를 감정의 주체로 되돌려놓는다. 나는 무뎌지지 않기로 했다.
② 적응은 감정 없는 생존이 아니라,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기술이다
기후적응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감정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지나치게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준비다.
나는 더워서 짜증이 날 수 있고, 비가 와서 무서울 수 있고, 공기가 나빠서 우울할 수 있다. 그 감정은 생존의 징후다. 그 감정들을 무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 감정에 맞춰 삶의 방식을 바꿔가는 것이 진짜 기후적응이라고 나는 믿는다.
결론: 재난 문자에 반응하는 나를 지키기 위해
‘적응’이라는 단어는 생존을 의미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정보의 습관보다, 감정의 민감함을 더 오래 갖고 싶다.
재난 문자에 무뎌지지 않기. 기후 뉴스에 반응하기. 불편함을 회피하지 않기. 이것이 내가 실천하는 기후적응 방식이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살아간다. 그 위기 속에서도, 감정이 말라붙지 않게 살아내는 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또 하나의 생존 기술이다.